마이니치 신문
무라카미 하루키, 카탈루냐 국제상 스피치 원고 전문
(상) http://mainichi.jp/enta/art/news/20110611k0000m040017000c.html
(하) http://mainichi.jp/enta/art/news/20110611k0000m040019000c.html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스페인 북동부 카탈루냐 자치주 정부가 국제 인문과학분야에서 뛰어난 활동상을 보인 인물에게 수여하는 '카탈루냐 국제상'을 수상했다. 하루키의 수상소감이 트위터와 인터넷에서 회자되고 있어 공부를 위해 번역해 봤다. 1:1 직역보다는 뉘앙스를 살리고자 조금 의역해서 결과물은 원문과는 좀 다를 수도 있음. 

지난 금요일 (상)을 번역하고, 그 아래에 이어 (하)를 번역. 


[비현실적인 몽상가의 한 사람으로서]

제가 마지막으로 바르셀로나를 방문한 것은 2년 전 봄이었습니다. 사인회가 열렸는데, 놀랄 만큼 많은 독자들이 모였습니다. 긴 행렬이 생겨, 한 시간 반이 지나도 사인회를 끝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왜냐면요, 많은 여성 독자들이 저에게 키스해 줄 것을 원했거든요. 그래서 시간이 예상외로 오래 걸렸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세계 이곳저곳의 도시에서 사인회를 열었습니다만, 여성 독자들이 키스를 요구한 곳은 세계에서 이곳 바르셀로나 밖에 없었습니다. 이거 하나만 봐도, 바르셀로나가 얼마나 멋진 도시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랜 역사와 높은 문화를 갖고 있는 이 아름다운 도시에, 다시 한 번 올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합니다. 

그렇지만-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오늘은 키스 얘기가 아니라 조금 심각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모두 알고 계신대로, 지난 3월 11일 오후 2시 46분에 거대한 지진이 일본 동북지방을 급습했습니다. 지구의 자전이 약간 빨라져서 하루가 백분의 1.8초 짧아질 정도로 큰 규모였습니다. 

지진 자체로 인한 피해도 막대했지만, 그 뒤에 찾아온 쓰나미는 끔찍한 상처를 남겼습니다. 장소에 따라 쓰나미가 39미터 높이에 달한 곳도 있었습니다. 39미터라고 하면, 보통은 빌딩의 10층까지 뛰어올라가도 살 수 없는 높이입니다. 해안가에 있던 사람들은 미처 피하지 못해 2만 4천여명이 희생됐고, 9천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행방불명인 상태입니다. 방파제를 훌쩍 넘어 공격해 온 파도에 휩쓸려서 아직 시신조차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차가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을 겁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만약 제가 그 입장에 처했다고 상상한다면, 폐가 오그라듭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상당수가 가족이나 친구를, 집과 재산을, 그들만의 공동체를, 생활의 기반을 잃었습니다.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마을도 있습니다. 살아갈 희망 그 자체를 모조리 빼앗겨버린 사람들의 수도 엄청나게 많을 겁니다. 

일본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많은 자연재해와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일본 국토의 대부분은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태풍의 통과 경로가 됩니다. 매년 반드시 큰 피해가 나서 많은 인명을 잃습니다. 각지에서 활발한 화산활동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물론 지진도 있습니다. 일본열도는 아시아 대륙의 동쪽 구석, 4개의 거대 플레이트 위에 타고 있는 것처럼 위험한 위치에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대로, 지진의 '둥지' 위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풍이 오는 날짜나 지나가는 길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만, 지진에 대해서는 예측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 다른 대지진이 가까운 장래에 틀림없이 온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2, 30년 안에 도쿄 주변의 지역에 진도 8급의 대형지진이 일어날 거라고 많은 학자가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10년 후일지도, 어쩌면 내일 오후일지도 모릅니다. 만약 직하형 지진이 도쿄처럼 밀집된 거대도시에 일어난다면, 도대체 얼마만큼의 피해를 일으킬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쿄 시내에만 천 3백만명의 사람들이 지금도 '보통의' 일상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변함없이 만원전철을 타고 출근하고, 고층빌딩에서 일합니다. 이번 지진이 일어난 뒤에 도쿄의 인구가 줄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왜? 당신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어째서 이렇게 무서운 곳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당연한 듯이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공포로 머리속이 이상해져 버리지 않는가?' 라고 말입니다.

일본어에는 무상(無常)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상태, 즉 한결같은 상태는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것은 마침내 소멸해, 머무르지 않고 계속 변해간다. 영원히 안정되거나, 의지할 만큼 변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가치는 어디에도 없다. 이건 불교에서 유래한 세계관입니다만, 이 '무상'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종교와는 조금 다른 맥락으로 일본인의 정신세계에 강하게 각인되어 민족적인 멘탈리티로서 예전부터 변함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모든 것은 다만 지나쳐 간다"라고 하는 시점은, 말하자면 '포기의 세계관'입니다. 인간이 자연의 흐름에 역행해도 어차피 아무 쓸모없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일본인은 그런 포기의 한가운데에서, 오히려 적극적인 아름다움의 존재방식을 발견해 냈습니다. 

자연에 대해 말해볼까요. 우리는 봄이 되면 벚꽃을, 여름에는 반딧불을, 가을에는 단풍을 사랑합니다. 그것도 집단적, 관습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거의 당연한 것처럼, 열심히 감상합니다. 벚꽃이 피는 장소, 반딧불을 볼 수 있는 명소, 단풍으로 유명한 곳은 각각의 시기가 되면 발디딜 틈 없이 붐비고, 그런 곳은 호텔을 예약하기도  어렵습니다. 

왜일까요?

벚꽃도, 반딧불도, 단풍도,  아주 잠깐동안의 시간이 지나면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찰나의 영광을 목격하기 위해 멀리까지 발길을 옮깁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이내 눈 앞에서 꽃잎으로 흩날리고, 작은 불빛마저 잃어버리고, 선명한 색깔을 바래는 것을 확인하고는, 오히려 마음을 놓습니다. 아름다움의 절정이 지나가고 끝내 사라져 버리는 것에 역으로 안심하는 겁니다. 

그런 일본인의 정신세계에 과연 자연재해라는 것이 영향을 미치고 있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차례차례 다가오는 자연재해를 극복해, 어떤 의미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피해를 집단적으로 극복하는 형태로 삶을 계속해 온 것은 확실합니다. 어쩌면 이런 경험은, 우리의 미의식에도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릅니다. 

이번 대지진으로 거의 모든 일본인이 극심한 충격을 받았고, 제아무리 평소 지진에 익숙한 일본인이라고는 해도 그 피해규모의 거대함 앞에 아직도 잔뜩 움츠러들어 있습니다. 무력감을 안고, 국가의 미래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마음을 다시 그러모아 부흥을 향해 일어서겠죠. 이 점에 대해서는, 저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면서 긴 역사를 살아온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고 충격에 사로잡혀 있을 수는 없습니다. 무너진 집은 일으켜 세우고, 부서진 도로는 복구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 지구라고 하는 별에 제멋대로 세들어 사는 존재입니다. 제발 여기 살아 주세요, 라고 지구에게 부탁받은 게 아닙니다. 조금 흔들렸다고 해서 불만을 제기해서도 안됩니다. 때때로 흔들릴 수도 있다는 것이 지구의 속성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싫든 좋든, 그런 자연과 공존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건물이나 도로와는 다르게, 그리 간단하게는 복구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입니다. 말하자면 '윤리' 혹은 '규범'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형체를 가지고 있는 물체가 아닙니다. 일단 손상돼 버리면, 간단히 원래대로는 돌아올 수 없습니다. 공구가 준비되고, 사람이 모여들고, 재료가 갖춰지면 바로 고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후쿠시마의 원자력 발전소 이야깁니다. 

여러분도 이미 알고 계신대로, 후쿠시마에 지진과 쓰나미 피해를 입은 6기의 원자로 가운데, 적어도 3기는 복구되지 않은 채로 아직도 주변에 방사능을 흩뿌리고 있습니다. 멜트다운으로 인해 주변의 토양은 오염되고, 아마 상당한 농도의 방사능을 포함하고 있을 유출수가 근처 바다에 흘러들고 있습니다. 바람이 이를 광범위하게 운반합니다. 

10만이 넘는 사람들이 원자력발전소 주변지역에서 대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밭과 목장과 공장과 상점가와 항만은 무인지경으로 방치됐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제 두 번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 피해는 일본 뿐만 아니라,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만, 주변의 여러 나라들에게도 미치게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런 비참한 사태가 일어난 걸까요. 그 원인은 명확합니다.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한 사람들이 이 정도 큰 쓰나미가 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몇 명의 전문가들은 일찍이 이 지역에 이번과 같은 규모의 큰 쓰나미가 왔던 사실을 지적하고 안전기준을 손볼 것을 요구해 왔지만, 전력회사는 그런 지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몇 백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한 큰 쓰나미를 위해 거금을 투자하는 것이 영리기업에게는 그다지 환영받을 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 원전의 안전대책을 엄격하게 관리해야 할 정부도, 원자력 정책을 밀고 나가기 위해 안전기준의 레벨을 낮춰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그런 사정을 조사해, 혹시 실수가 있다면, 명확하게 밝히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실수 때문에 적어도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땅을 버리고, 생활을 바꿀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화내지 않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건 당연한 겁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본인은 원래 잘 화를 내지 않는 민족입니다. 참는 것에는 뛰어나지만,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에는 그 정도로 능숙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은 어쩌면 이곳 바르셀로나 시민들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번 일로 그렇게 화를 잘 내지 않는 일본인들도 진지하게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는 그런 일그러진 구조의 존재를 지금까지 허락해 왔던, 혹은 묵인해 왔던 우리 자신을 규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사태는 우리의 윤리나 규범에 깊은 관계가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알고 계신 것처럼, 우리 일본인은 역사상 유일하게 핵폭탄을 맞은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라는 이름을 가진 두 곳의 도시에 미군 폭격기가 원자폭탄을 투하해 도합 2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망자는 대다수가 비무장 일반 시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일의 시비를 가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원폭이 떨어진 직후 숨진 20만 명 뿐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의 대다수가 그 이후 방사선 피폭 증상으로 괴로워하면서, 오랜 시간에 걸쳐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핵폭탄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방사능이 이 세계와 인간의 몸에 얼마나 깊은 상흔을 남기는지를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통해 배운 것입니다. 

전후 일본의 행보에는 두 가지 커다란 근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경제 부흥' 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쟁 금지'였죠.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무력을 행사하지 않고, 경제적으로는 풍요롭게 되는 것.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평화를 희구하는 것. 이것이 일본이라는 국가의 새로운 지침이 되었습니다. 

히로시마에 있는 원폭사망자위령비에는 이런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평안히 잠드소서. 잘못은 반복하지 않을 테니까요.

멋진 말입니다. 우리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합니다. 이 말에는 이런 의미가 포함돼 있습니다. 핵이라고 하는 압도적인 힘 앞에서 우리는 피해자이기도, 가해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 힘의 맹위에 노출돼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피해자이고, 그 힘을 이끌어 낸 점에서는, 또 그 힘의 행사를 막을 수 없었다는 점에서는 우리는 모두 가해자이기도 합니다. 

원폭이 투하된 지 66년이 지난 지금, 후쿠시마 제1원전은 3개월 동안 방사능을 방출해, 주변의 토양과 바다와 공기를 계속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멈출 수 있을지는 아직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이건 우리 일본인이 사상 두 번째로 체험하는 방대한 핵피해입니다만, 이번에는 누군가 우리에게 핵폭탄을 떨어트린 것이 아닙니다. 일본인 스스로 밥상을 차리고, 스스로의 손으로 잘못을 저지르고, 스스로 터전을 잃고, 스스로 생활을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된 걸까요? 전후 오랜 기간동안 우리가 품어왔던 핵에 대한 거부감은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요? 우리가 일관적으로 추구하던 평화롭고 풍요로운 사회는 대체 무엇때문에 상실되고, 일그러져 버린 걸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효율' 때문입니다. 

원자로는 효율이 높은 발전시스템이라고 전력회사는 주장합니다. 즉, 이익이 올라가가는 시스템이라는 겁니다. 또 정부는 오일쇼크 이후 원유 공급의 안정성에 의문을 품고, 원자력 발전을 국책으로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전력회사는 막대한 돈을 광고비로 지불해서 미디어를 매수해, 원자력 발전은 어디까지나 안전하다고 하는 환상을 국민들에게 심어 왔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정신을 차려보니, 일본 발전량의 약 30%를 원전이 담당하게 됐습니다. 국민들이 잘 모르는 사이에, 지진 많은 길쭉한 섬나라 일본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원전이 많은 나라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일단 일이 터지면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미 일어난 '기정 사실'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원자력 발전에 걱정과 두려움을 품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러면 당신은 전기가 부족해도 좋다는 거죠?"라면서 협박 비슷한 질문을 마구 퍼붓습니다. 국민들 사이에도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원전에 기대야 하나봐."라는 기분이 퍼져 나갑니다. 고온다습한 일본에서, 여름에 에어콘을 쓸 수 없게 되는 것은 거의 고문에 가깝습니다. 원전에 의문을 드러내는 사람들에게는 '비현실적인 몽상가'라는 레테르가 붙여집니다. 

이렇게 해서, 지금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효율적라고 하던 원자로는, 마치 지옥의 뚜껑을 열어버린 것처럼 비참한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원자력 발전을 추진하던 사람들은 '현실을 직시하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현실'은 현실도 다른 그 무엇도 아닌, 그저 표면적인 '편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걸 그들은 '현실'이라고 하는 단어로 치환해서 논리를 대체해 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이 오랜 시간에 걸쳐 자랑해 왔던 '기술력' 신화의 붕괴인 동시에, 이런 식의 대체를 눈감아 준 일본인의 윤리 규범의 패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전력회사를, 정부를 비난합니다. 그건 물론 당연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스스로를 고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엄격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어딘가에서 같은 실패가 반복되지 않겠습니까.

평안히 잠드소서. 잘못은 반복하지 않을 테니까요.

우리는 다시 이 말을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원폭 개발의 중심에 섰던 사람인데,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일으킨 참상을 알게 된 뒤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대통령님, 제 양 손은 피투성이가 되었군요." 트루먼 대통령은 깔끔하게 접혀진 하얀 손수건을 주머니에서 꺼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이걸로 닦으시게나." 그러나 말할 필요도 없이, 그렇게 많은 피를 닦아낼 수 있을 만큼 청결한 손수건 따위는 이 세계 어디를 뒤져도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일본인은 핵에 대해 '노!'라고 외쳐 왔어야 했다는 게 저의 의견입니다. 

우리는 기술력과 지혜를 모으고 사회적 자본을 투입해, 원자력 발전을 대체하는 유효한 에너지 개발을 국가 차원에서 추구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설령 전세계가 "원자력 만큼 효율이 좋은 에너지는 없다. 원자력을 사용하지 않는 일본인은 바보다."라고 비웃어도, 우리는 원폭 경험으로 체득한 '핵 알레르기'를, 꿋꿋이 지켜왔어야 했습니다. 핵을 사용하지 않는 에너지 발전을, 일본 전후 행보의 중심명제로 뿌리박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숨진 수많은 희생자들에 대해, 우리 모두가 책임을 지는 방법이었을 겁니다. 일본에는 그런 식의 튼튼한 윤리 규범이, 그리고 사회적 메시지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일본인이 세계에 정말로 공헌할 수 있는 커다란 기회였을 겁니다. 그러나 급격한 경제발전 과정에서, '효율'이라고 하는 안이한 기준이 흘러넘친 탓에, 이렇게 중요한 이치를 우리는 깨닫지 못했던 겁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 아무리 비참하고 심각하다고 해도 우리는 자연재해의 피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 시련을 극복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이 더욱 강하고 깊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그렇게 할 겁니다. 

부서진 도로나 건물을 재건하는 것은, 그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의 일입니다. 그러나 손상된 윤리 규범의 재생을 시도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우리는 죽은 이들을 애도하고, 재해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그들이 받은 고통과, 상처를 헛되게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이 작업을 시작합니다. 작업은 수수하고 묵묵한, 인내를 필요로 하는 수작업이 될 겁니다. 활짝 갠 봄날 아침, 어느 마을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들판에 나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처럼, 모두 힘을 합해 이 작업을 진전시켜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각자가 가능한 방법으로, 그러나 마음은 하나로 합쳐서 말입니다. 

이 대대적인 집단 작업에, 말을 전문으로 하는 우리들, 즉 전업 작가들이 엮여 들 부분이 있을 겁니다. 우리는 새로운 윤리 규범과, 새로운 단어를 연결해야 합니다. 그것은 '씨뿌리는 노래' 처럼, 사람들을 위로하는 율동을 가진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 작가들은 일찍이, 같은 방법으로, 전젱으로 폐허가 된 일본을 재건해 왔습니다. 그 원점에서 우리는 다시 일어서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는 '무상(無常)'이라고 하는 덧없이 흘러가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생명은 태어나고, 단지 흘러가고, 예외없이 소멸해 갑니다.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은 무력합니다. 이 덧없음을 인식하는 것은 일본문화의 기본적 이데아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라지는 것에 대한 경의와, 위험으로 가득한 세계에서도 생생하게 살아가는 것들에 대한 조용한 결의, 그런 긍정적인 정신도 우리는 갖추고 있을 겁니다. 

제 작품이 카탈루냐의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 이런 훌륭한 상을 수상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사는 장소가 멀리 떨어져 있고, 쓰는 말도 다릅니다. 문화도 서로 다릅니다. 그러지만 동시에, 우리는 같은 문제를 짊어지고, 같은 슬픔과 기쁨을 끌어안고 있는 세계 시민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 작가가 쓴 이야기가 몇 권쯤 카탈루냐어로 번역되어, 이곳 사람들의 손에 오르기도 하는 겁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하나의 이야기가 모두에게 공유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꿈꾸는 것은 소설가의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 중요한 일은, 사람들과 그 꿈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 공유가 없다면, 소설가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카탈루냐인들이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많은 고난을 극복하고, 때때로 가혹한 일을 당하면서도 강하게 살아남아, 풍요로운 문화를 지켜 온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희들(일본인) 사이에는 함께 나눌 것이 분명히 많을 겁니다. 

일본에서, 그리고 이곳 카탈루냐에서, 여러분과 우리들이 함께 '비현실적인 몽상가'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면, 국경이나 문화를 뛰어넘은 '정신적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멋질까요. 그것이야말로 최근 이런저런 심각한 재해나, 비참하기 짝이 없는 테러를 통과해 온 우리들의 재생을 위한 출발점이 되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꿈꾸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발걸음이 '효율'이나 '편의'라는 이름을 가진 재앙의 앞잡이들을 따라가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힘찬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가가는 '비현실적인 몽상가'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인간은 언젠가 죽고, 사라져 갑니다. 그러나 '인간성(Humanity)'은 살아 남습니다. 그것은 언제까지나 계승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인간성의 힘을 믿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상금은 지진 피해와 원전사고의 피해를 입은 분들께, 의연금으로 기부하고 싶습니다. 이런 기회를 주신 카탈루냐의 여러분과, '자날리스타 데 카탈루냐'의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 며칠 전 로루카 지진에서 피해를 입은 모든 분들에게도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바르셀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