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해문, <아이들은 멸종하는가>

 

 나는 묻고 싶다. 당신들은 이 견디기 어려운 세상에서 무슨 힘으로 그나마 버티며 살고 계시는지를 말이다. 감히 말하건대 나는 그 답을 알고 있다. 우리는 어려서 놀았던 힘으로 오늘을 산다. 어려서 동무들과 형과 누나, 동생과 골목과 마당과 들과 냇가에서 하루가 짧은 것에 발을 동동 구르며 해 빠지도록 놀며 길렀던 몸과 마음의 힘을 조금씩 꺼내 이 어려운 지금을 산다. 아닌가.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렇다면 이런 힘이 없는 아이들은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낼 수 있을까. 느닷없지만, 놀다가 금밟으면 죽었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죽었다. 그러나 아주 죽지는 않는다. 다음 판에 또 살아난다. 죽고 사는 경험을 어디서 이렇게 마음의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배부르게 할 수 있을까. 비석치기, 처음에는 안 된다. 조금 애써도 잘 안 된다. 비석치기를 좀 하려면 한 철은 매달려야 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된다. 이번에는 고무줄 하잔다. 고무줄 또 안 된다. 조금 하면 조금 된다. 집에 와서 의자와 동네 전봇대에 고무줄 걸어놓고 혼자 해본다. 동무들과 만나 한다. 된다. 우리는 이렇듯 많고 많은 놀이와 놀이 사이를 건너 뛴 다음 세상의 벽과 만났다.

 

 놀이와의 첫 만남은 때론 좌절이었다. 그러나 언니고 누나고 형들이 자꾸 해보란다. 어느 날 잘되는 경험이 놀이 수만큼 쌓인다. 오늘 아이들을 본다. 유치원, 어린이집부터 대학을 나와서까지 넘어야 할 산들이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걷다가 넘어질 일이 수두룩할 터인데 어떻게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나 걸어갈 수 있을까. 아이가 다시 일어서 가려면 이 아이한테 우리는 무언가 허락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놀이다. 놀려면 시간이 있어야 하고 놀 터가 있어야 한다. 당신은 지금 아이들에게 놀 틈과 터와 동무를 주고 있는가. 우리 아이들에게 이 사회에서 퍼붓는 화살과 그 때문에 받을 상처의 크기와 종류는 갈수록 많아지고 커지는데 아무도 아이들에게 이 상처를 딛고 일어설 힘을 어떻게 기르라고 안내해주지 않는다. 나는 이 대목에서 숨이 멎고 막힌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10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