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50064&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9

왜 김예슬의 대자보에만 주목하나

[주장] 고려대이기에 가능할 수 있었던 자퇴 센세이션을 보고

 

김예슬씨와 같은 시대, 같은 해에 대학을 다니고 있었던 나로서도 김예슬씨의 고려대 자퇴선언이 동경의 대상임에는 틀림없다. 치열하게 살았을 그녀, 끊임없는 사회성찰과 자기비판을 통해 생각을 현실로 옮겼을 것이므로 나는 그녀의 행동에 어떠한 훼방을 놓을 마음도 없다. 다만, '당신들'의 행동에 훼방을 놓고 싶다. 

 

'지잡대 생'도 주목해주시나요?

 

나는 인터넷에서 종종 '원세대'라 불리우는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 다니고 있다. 말만 연세대학교지 툭툭 던지는 댓글의 점층으로 인해 거의 '지잡대(지방 잡 대학)'로 분류되고 있는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는 입학 결과로만 본다면 대체로 2~4등급 정도의 학생들이 다니고 있는 학교가 되시겠다. '최소' 상위 1%라는 신촌 연세대학교와는 '급'을 달리 하는 학교다. 특히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등등과 더불어 실력은 안 되는데 '수도권 대학의 타이틀'을 사칭하고 싶은 속물들이나 가는 학교로 오해받는 것이 특징이다.

 

만약 이런 내가 우리 학교 정문이나 학생회관에다가 '우리나라의 대학현실과 사회현실을 경멸하며 그러므로 대학을 거부한다'며 대자보를 붙인다면 여러분들은 주목해 주시겠는가? 기자님들께서는 취재를 해주시겠는지? 물론 학내신문, 학교 커뮤니티 게시판 정도에 실리며 파장을 일으킬 수는 있겠지만, 사회적으로는 고작해야 블로그에 올라가는 정도, 혹은 취재된다고 해도 수많은 기사속에 묻히며 몇몇 분들이 선심쓰듯 던져주는 '옛다 관심~' 정도가 아닐런지?

 

자퇴 사태에도 흥행의 보증수표는 필요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시간 동안 우리나라 사회가 이상하다, 대학이 잘못됐다, 교육이 비정상적이다라며 '교육시스템'을 거부했다. 그것은 대안학교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자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으며, 유학과 이민이라는 시스템 속에 투영되기도 했다. 여러분들은 <VJ특공대>에서 시골에 낙향해서 상추 따는 초등학생들과 부모들을 본 적이 없는지? 혹은 여행 프로그램을 통해 16세 나이에 인도에서 인생공부를 하고 있는 소녀를 목격해본 적은 없는지? 왜 우리는 그들에는 '특별히' 주목하지 않는가. 그들과 김예슬씨는 무엇이 다르기에.

 

김예슬씨와 비슷한 경우로는 에픽하이의 타블로가 있다. 타블로는 170이라는 가공할 만한 IQ를 가진 두뇌의 소유자로, 어렵지 않은 가정환경을 가지고 있으며 스탠퍼드대학원의 영문학 석사학위를 따고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선택한 경우다. 남다르게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도 명예를 버린 용기, 고국에 돌아와서 자신이 갈망했던 음악으로 성공한 타블로에 우리는 열광한다. 그리고 타블로를 멋있다고,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이 뚜렷한 대비에서 우리는 우리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김예슬과 타블로에 열광하는 것은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성취'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성취는 수직적 학벌사회가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다름아닌 '명문대'에 대한 성취임을.

 

대학이 범람하고, 대학입학이 교육의 지상과제가 되고 있는 오늘날 명문대생은 사회의 중심, 사회적 주류, 사회의 리더란 말과 다르지 않다. 수많은 사람들이 대학을, 입시교육을 거부하고 인생을 배우러 떠나갔음에도 그들이 주목받지 못했던 이유는 우리가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있는 학벌이 그들안에는 내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김예슬, 타블로와는 다르게 곁가지였을 뿐이며, 주류가 될 수 없는 주변부, 혹은 낙오자였다. 그래서 그들은 '크게' 흥행할 수 없었으며 사회적인 울림을 만들어내는 데 한계가 컸다.

 

<김예슬>이라 쓰고, <명문대생>이라 읽을 때에 비로소 충격적이다

 

얼마전에 들었던 수업이 생각난다. 이 독특했던 수업에서 강사님은 88만원 세대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던 것 같다. 88만원 세대 이전에도 수많은 20대들은 88만원 미만의 임금을 받으며 생활을 영위해나가고 있었다는 것. 언론이며, 학자들이 '88만원 세대'라는 말을 만들어내고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그것이 비로소 수도권 소재 명문대학에서도 일반적인 현상으로 나타났을 때였다는 것. 즉, 주목할 만해야 주목한다고. 주류의 모습이기 이전 곁가지 단계, 비주류의 단계에서는 그것을 현상으로 읽어내지 않고 외면해 버리는 우리사회의 이중성에 대해서.

 

이 <김예슬 사태>도 그 판박이가 아닌지? 연일 김예슬씨에 대한 기사를 쏟아내고 있는 언론을 보자면 마치 이 김예슬씨 이전에는 'Like김예슬'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문제도 아니었다는 듯 보인다. 비로소 김예슬씨에 이르러서야 충격을 받고 인터뷰도 하지 않는 김예슬씨를 대자보 문구 하나하나로 엄청나게 확대재생산하며 대학을 돌아보고 20대를 돌아보는 우리나라 미디어와 언론, 여론의 담론생산구조. 씁쓸하다.

 

흥행이 끝나면 다시 묻혀버릴, '진정한' 이야기

 

'김예슬 이후'를 생각해본다. 어떤 언론은 어렵게 어렵게 김예슬씨를 인터뷰해서 기사를 쏟아낼 수도 있고, 자퇴 후에 김예슬씨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추적하는 언론도 나올 수 있겠다. 온갖 비평가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계속 김예슬씨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칼럼이며 비평이며 기획기사를 쓸 것이고, 정치인들도 한두 번은 이슈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몇 달이 지나면 김예슬씨마저 잊혀질 것이고, 사회는 온갖 성공담을 통해 위너와 루저의 기준을 끊임없이 재생산할 것이다. 머리를 염색하고 고등학교를 자퇴한 아이들의 이야기는 문제아로 치부되어 욕설의 배설구가 되어 버릴 것이고 인도로 여행을 간 어느 소녀의 이야기는 영원히 주변부일 것이다. 몇 년 뒤에 제 2, 제 3의 김예슬씨가 나타날 때까지 이 센세이션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한편으로 입시교육을 욕하고 등록금을 올리는 대학을 비난하며 김예슬씨가 대단하다고 읊조리는 우리. 그러나 주류와 비주류를 따지지 않고 '진정한' 이야기를 나눌 여유 따위는 우리에게 없다. 어떻게든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직장을 마련해야 하고 서울에 몇 억짜리 집을 사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싼 옷, 값비싼 음식, 최첨단 전자제품이 우리에게 절실한 것과 마찬가지다. 특히 저 언론, 미디어, 댓글들도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저기 나오지 않으면 다 찌질해보일 뿐이잖는가.

 

우리는 충분히 이중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