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장애인들, 비너스에 똥침을 놓다

박창우

일본 장애인 극단 타이헨의 '황웅도 잠복기'가 3월 21일과 22일 서울, 25일 황웅도의 고향 경남 고성에서 공연을 갖는다. 중도장애인인 재일동포 3세 김만리씨가 이끄는 타이헨은 1983년 창단이래로 신체장애의 움직임을 표현예술로 추구해온 창작 집단이다. '황웅도 일대기'는 지난 2009년 일본 오사카 초연 당시 살풀이, 탈춤, 풍물, 판소리 등 한국 전통연희와 배우들의 절묘한 신체 표현으로 현지에서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이번 한국 공연에는 국내 장애인들이 보조출연진으로 출연한다. 타이헨은 “한국과 일본의 장애인과 일반 시민들이 협력하는 공연을 함으로써 한 극단에 의한 공연활동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민간 예술교류를 실현하고자 한다”고 공연취지를 전했다. 이번 공연을 위해 지난해 5월부터 한국 보조출연진들과 수차례 연습을 진행한 바 있다. '황웅도 일대기'는 1900년대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의 민속 극단을 만든 독립운동가이자 예술가 황웅도의 실제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타이헨에 의해 연출, 작품화되었다. 특히 이번 공연에는 새날동대문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박창우 활동가도 보조출연진으로 출연하다.
(DPI Magazine 3월호 기사에서 발췌.)

위의 기사대로 나는 지난 1년 동안 타이헨의 연극 연습과 공연에 엑스트라로 출연하며 함께했다. 내가 사무실 상사들과 동료들의 구박과 눈치를 보면서까지 이 작업에 참여한 이유는 활동가로 활동하면서 끙끙거려왔던 몇 가지 의문점의 해소와 소수자문화, 그 중에서 장애문화에 대해 조금의 힌트라도 얻고 싶어서였다.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도 힘든 이 땅의 장애인들의 실정에서, 의문점이니 문화니 하는 오뉴월 막걸리 배터지게 마시고 물똥 싸는 소리냐고 하겠으나, 아무리 복지법과 편의시설 등 환경적 요인이 잘 정비되어 있다 하더라도 장애인들이 진실로 참됨 삶을 누릴 수 있을까? 장애인들, 특히 우리 중증장애인들은 사회적으로 창녀촌 개새끼 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있는 이런 현실에서... ㅎㅎㅎ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장애인 고유의 문화가 필요하다. 그런 문화가 있고서야 장애인으로써의 자긍심 또는 긍지 등과 같은 well-being의 참된 재료들을 얻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장애를 극복 후 얻게 되는 그런 자기 부정적인 것이 아닌 존재 자체에서 느끼게 되는 그 무엇...) 사회 가장 밑바닥의 부류들이 무슨 얼어 죽을 자긍심이냐 하겠지만 그럴수록 더 필요한 것이 자기 존재의 - 스스로의 - 인정이다. 그렇지 못할 때의 - 극단적인 - 예들.
  • 소위 잘 나간다는 (몇몇) 장애인들에게서 느껴지는 자신의 존재성을 구걸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럴 적에 같은 장애인이라서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더러운 기분.. 비참함 같은...
  • 내가 가족이란 감옥에서 복역할 때 하루에도 수 십 번씩 자신을 죽여야 하는, 매일 간을 뜯기는 프로메테우스였다.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너는 종교 서적을 많이 읽어서인지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한 것 같구나.”란 칭찬(?)을 들었을 때의 그 황당함과 절망감.. 그 무지에 대한 증오... (현재 자립생활을 하고 있는 나에게 가장 최고의 것은 내 존재의 핑계거리를 - TV 리모콘 버튼 같은 - 지극히 하찮은 것에서라도 어거지로 창작해내는 고역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나는 자긍심으로 심장을 뛰게 하는 에너지로 삼을 정도의 경지에는 너무 멀었다.) (재언하지만) 배부르고 등 따습다고 다 해결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럴수록 자기 존재의 - 스스로의 - 인정, 자긍심이란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조선 시대, 인간으로서도 허락 받지 못해 옆으로 뒤뚱거리며 걸어야 했던 갖바치도 가장 아름답고 맞춤의 신을 만든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듯이...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아직 장애문화는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다.. 기껏해야 비장애인 흉내나 내는 - 또는 오직 그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 연극이나 노래 등등... 그리고 장애 팔아서 밥 벌어먹는 수단으로써의 그런 것들... 이런 것들은 진정한 장애문화가 아니다. 장애문화는 특정 소수만이 향유하는 (고급인 것 같은) 문화가 아니라 장애대중이 즐기고 느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 장애인들의 삶이 온전히 배어 있어서 장애인이라면 누구나 함께 느끼고 호흡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진정으로 장애문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조선 시대 억압 받던 민중들은 지배 계급인 양반들과는 다른 문화를 창조하고 영위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하회별신굿탈놀이나 봉산탈춤 등과 같은...

장애인의 몸은 다르다. 그러므로 우주를 바라보고 표현하는 방법도 달라야 하지 않을까? 장애인이 - 사회에 의해 덧씌워진 그 무엇이 아닌 - 그 자체로서 아름다울 수 있을까? 지금껏 앓아왔던 이런 질문들의 해답을 얻기 위해 나는 타이헨을 만났다. 작년 5월경 김만리 선생과 타이헨을 접했을 때의 처음 느낌은 ‘색다름’, ‘신선함’ 그리고 ‘반항’이었다. 그 때까지 내가 경험해 본 장애인 연극은 비장애인 흉내나 내려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타이헨의 표현은 마르고 비뚤어지고 꿈틀거리고 비틀거리는, 세상에서 가장 추하다고 여기는 장애인들의 형상과 동작들로 우주를 말하고 있다. 비할 데 없이 아름답고 완전하다고 믿도록 강박시키고 있는 우주를 - 가장 불완전하고 아름답지 못한 존재로 규정된 - 장애인들의 몸뚱이로 그러한, 형상과 동작들로 선포하고 있다. 당신네들의 우주는 이렇게 불완전하며 이것이 실재적인 우리 우주의 모습이라는 것을... (나는 이것이 세상이 장애인을 증오하는 이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또한 지난 1년간 우리가 했던 작업은 세상이 규정지어 놓고 규격화시켜 놓은 세상의 정의와 가치와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한 ‘반항’이다.
10%의 영리한 삶을 정상과 정의와 지고한 가치로 세뇌시켜 놓고 그렇지 못한 90% 존재들에 차별과 억압을 가하는 세상을 할퀴는 어린아이의 날카로운 손짓이며 김태희와 장동건을 소비시키기 위해,  그것을 아름다움으로 규정해 놓은 비너스의 항문에 작열시킨 예리한 똥침이다.

서울 공연을 마치고 경남 고성에서의 멋진 경험.. 공연 전날 고성오광대전수관에서 벌어진 세미나와 춤판들... 오광대춤과 문둥이춤... 공간을 나누는 몸짓, 손짓.. 공간이 쪼개지고 하나로 되면서 분출되는 무음의 언어들... 그런데 그런 놀이, 노래, 춤들이 당시의 지배계층인 양반들이 아닌 양민과 천민들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단 것.. 그 당시의 대중들이 느끼고 즐긴 그들의 삶, 자체였다는 것. 조작된 소리들과 어린 여자애들 벗기기 경쟁하는 요즘의 (소위) 대중예술과는 차원이 다른 멋이다! 그 분들과 어우러진 고성에서의 협동 공연. 조선 시대 핍박 받던 민중들의 삶의 몸짓과 오늘의 천민인 장애 몸뚱이의 만남.. 어둠과 춤과 기괴한 동작들.. 모든 질서는 무너지고 카오스로의 귀환!

공연하는 정지된 시간 동안 나는 진실로 웃고 울었다. 
세상의 모든 병신들 신명나게 꼴값 떠는 세상!
봄날의 푸른 하늘보다 더욱, 눈물 나게 그리운 나의 이상향!
병신들이 마음껏 꼴값 떠는 그런 세상을 살짝 엿볼 수 있었기 때문에 행복했다.
그리고 나는 슬펐다.
무대의 한 발자국 밖, 거대한 깊고 넓고 검은 현실의 대양.
그 대양에서 허우적거리는 지푸라기들... 땅에 떨어져 썩어져야 되는 것이 꿈과 이상의 숙명이란 것을 알고 있기에...
그 이상이 싹 틔어서 열매를 맺으려면 억겁의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천연적으로 알고 있기에...
절망이라는 표현조차 너무 화려하다.

거의 2주 동안의 꿈결을 해매고, 보석 같은 소소한 느낌들과 소중한 배움과 깨달음의 지극히 작은 조각들을 가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우주들을 조금은 다르게 만날 수 있는, 어리석음이 씻기어 있기를, 진실로 조금은 씻기어 있기를 기대해 본다.